어울림 - 자연과 어울어지기, 그 첫걸음

About Me

자연을 공부하는 人입니다. 생물의 죽살이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해온 문화와 이야기도 함께 알아가고 싶습니다.

I am studying nature. I want to know not only the life history of living things, but also the culture and stories they and humans have shared together.

Search

License


more detail
블로그의 모든 글과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상기의 Creative Commons License를 따르며 기타 인용한 내용이나 스크랩한 글들은 모두 해당 저자에게 저작권이 있음을 알립니다.

Profile

군생활과 군복무기간


1999년 그때는 군복무기간이 26개월이었다. 2년 2개월의 애매한 군복무기간때문에 대학생인 경우 12월이나 1월에 가게 되면 학교로 바로 복학하는 경우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군생활까지 합쳐 3년을 쉬는 것이 다반사였다.

나보다 이전 군선배들도 들었던 이야기겠지만 군생활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했다. 내심 내 군생활 동안 며칠이라도 좋으니 군생활이 줄어라 하며 노래를 불렀지만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다가 병장즈음에 정작 군복무가 2년으로 확정되자 딱 내 군번까지 대상에서 제외되어 단 하루도 혜택을 받지 못한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등병 6개월, 일병 6개월, 상병 8개월, 병장 6개월이었는데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다. 종종 사촌동생이나 후배들에게 들어본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난다.

당시엔 지금에 비하면 월급이 아주 적었다. 아무리 많이 받아야 2만원 정도이고 평소에는 병장이 1만원 내외였으니 군것질 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런 돈도 거의 쓰지 않다가 계를 들어(남자들끼리도 그런 게 있었다.) 제대할 때 10여만원을 가지고 나왔고 분대장이 되었을 때는 모아두었다가 며칠동안 야외훈련이 있을 때 분대원들 간식을 사는데 탈탈 털어버리곤 했다. 제대를 앞두고는 분대원들 회식비로 모두 써버렸다. 2만원이 얼마나 되냐고 하겠지만 군대의 물가는 좀 달라서 분대원 6명 정도가 어느정도 배부르게 먹을 정도의 돈이었다. 휴가를 나가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오는게 싫어서 월급만으로 필요한 것들을 사고 생활했었다. 당시 내게 필요한 것은 별로 없었기에 가능했다.

지금부터 회고하는 내용은 엄연히 내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나와 같은시기에 군생활을 했다고 해도 부대마다의 특성이 워낙 달라 천차만별의 군생활을 했을 것이다. 이등병 시절, 처음 자대배치를 받고 보호대상이라는 표시로 노란색의 병아리 견장을 달았었다. 지금도 종종 TV에서 보면 아직도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병아리견장을 달고 있으면 함부로 놀리거나 장난을 치지 않고 처음 부대에 들어온 신병들이 부대돌아가는 상황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자대생활이 아직 미숙한 이등병들은 많이 어리버리해서 연병장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더랬다. 자대에서의 긴장감은 동기들하고만 있던 훈련소와는 많이 달랐었다. 내겐 5명의 동기가 있었는데 종종 동기없이 홀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일병이 되어서는 아침부터 잠자기 직전까지 바쁘게 일하는터에 아침에 세수를 해 본 기억이 없다. 이등병때도 자대생활한 이후로는 아침에 세수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등병이 빠졌다는 시선때문이었다. 내가 말년이 되었을 땐 아예 소대장들이 나서서 이등병들이 씻으러 갈 수 있도록 나서기까지 했었다. 한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불려다니며 일하다가 씻지도 못하고 점호하고 바로 잔 기억이 있다. 일병은 6개월이지만 일만 하다가 보면 번개같이 지나가는 시간이다. 상병은 무려 8개월이었기 때문에 지루한 시기였다. 상병이 꺾이면 선임급이 되어 이등병과 일병들에게 일을 시키고 소대 내 재물검사를 담당하는 등 중요한 일들이 맡겨졌다. 작업도 많이 하지만 단순히 힘만 쓰는 것이 아니라 후임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시키는 것까지 담당하여 상병급이 잘하면 소대생활도 많이 편해진다. 운이 좋으면 상병이 꺾이고 분대장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운이 좋지만도 않았던 것이 이등병부터 분대장을 달기 전까지 바닥 막내 생활을 할 정도로 꼬인 군번이던 내가 바로 윗고참의 사관생도 지원으로 인해 갑자기 풀리게 되었다. 물론 좋긴 했지만 탄약수 생활만 하다가 부포수, 포수를 한달씩만 경험하고 분대장이 되려니 많은 공부를 해야만 했다.

군생활동안 가장 힘든 것은 물론 장시간의 행군이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주특기 훈련, 고된 작업 등 많지만 쉬는 동안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다. 유일한 낙이자 소일거리라고는 편지쓰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겁고 힘들지만 행군을 하러 부대 밖으로 나가는 일이 내겐 행복이었다. 군생활전에도 산이고 들을 오가며 공부하던 터라 숲으로 훈련을 나가는 때면 내겐 보는 것이 곧 책이요 배움이었고 즐거운 취미생활이었다. 분대장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책을 봤다. 일병 때였던가 총기류를 닦다가 바닥에 깔아놓은 국방일보의 기사를 봤다는 이유로 엄청 혼나고 맞은 기억이 난다. 내가 군생활하던 곳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 고참들의 시선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개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상병 말호봉이나 병장때나 책을 볼 수 있었다. 분대장이 되고서는 시간이 날때마다 책을 보고 아침에도 조금 일찍 일어나서 책을 봤었다.

이등병때부터 상병이 되고서도 고참들은 무조건 순서대로 병기의 명칭과 부품, 제원들을 외우게 했는데 그게 싫어서 하사관에게 부탁하여 내 주특기의 교범을 빌려 공부하고 비가 오거나 주특기 실내 교육이 있을 때면 이전 고참들이 하던 방식을 버리고(제원이나 부품을 순서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모두 외워야했다.) 토론식으로 재미있게 진행했었다. 덕분에 후에 분교대 조교로 발탁되어 7주일정도의 파견을 3번정도 나가게 되었다. 종종 상병들을 모아놓고 포수교육을 시키면서 재미있는 문제를 내고 라면을 하나 부상으로 걸기도 했는데 언제나 인기만점이었다.

지금도 종종 독설적인 표현이나 말투가 섞여 나오는데 이건 모두 군생활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번 내뱉기 시작한 욕과 거친 말투는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후 오랫동안 느꼈다. 돌이켜보면 군생활이 참 재미있었다. 힘든 기억도 많고 나 역시 행군도중 물대논 물에 머리 박고 죽고 싶었던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힘든 것들을 모두 겪고나니 한계에 대한 기준이 크게 달라졌다. 크게 무너져버린 자존심을 계급이 올라가면서 다시 조금씩 쌓아올리고 나서는 다시 한번 나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느꼈다. 말년휴가때 복학준비를 다하고 제대하러 부대에 들어와 마지막 취침을 하던 날 새벽에 혼자 깨어 자고 있는 소대원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120여명과 함께 생활한 중대생활.. 120순위에서 시작해 1순위가 되어 나가는 내가 믿어지지 않았고 더 재밌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내게는 동기들이 5명 있었는데 그 중 3명이 뒷배경으로 자대생활에서 빠졌다. 한명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게로 군간부로 있던 친척의 도움으로 의가사제대를 했고 한명은 대대장 CP병을, 또 한명은 있지도 않던 주임원사 CP병 자리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빠져나갔다. 그리고 뒷배경없던 나와 거구의 동기 한명만이 서로 의지하며 꿋꿋하게 군생활을 해 나갔다. 그 친구와 함께 같은 날 제대하고 싶었는데 운없게도 녀석의 분대원중 한명이 자살소동을 벌여 아무 잘못없는 녀석이 연대책임으로 영창을 다녀오는터에 1주일이 제대가 늦어져 내가 먼저 부대를 나왔다. 처음 5명의 동기들이 이등병이었을 때 제대하는 날 연병장에 대고 2년간의 모든 설움과 고통을 다 함성으로 쏟아내고 나가자고 다짐했었는데 그걸 해낸건 나 혼자였나보다. 같이 제대한 동기는 모두 CP병으로 별로 동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낙오자들이었다. 그네들이 연병장에 쏟아낼 설움과 고통이 있었을까 싶다.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린 연병장에 대고 온갖 험한 말들을 쏟아내는 내게 위병소의 후임들은 처음보는 내 모습에 놀라는 듯 했지만 그네들도 꼭 나가는 날 그러리라 맘 먹은 녀석들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내 2년 2개월의 군생활은 끝났다. 훈련이 반이요 나머지는 작업이라 인근 농사짓는 주민들의 자원봉사, 대민지원, 수해복구, 진지공사, 수로공사, 방화선 작업 등 여러 작업들을 해보았고 무슨 일이든 더 배우고 싶어 그중 오바로크병이 되어 재봉틀도 만져봤다. 생물학과 출신임에도 의무병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응급처치교육은 3번을 받았다. 분교대 주특기 조교로 3번을 나갔었다. 훈련복이 지지리도 많아 남들 한번 뛰거나 제낀다는 유격을 2번이나 뛰었고 연대전술훈련(RCT)도 2번을 그 추웠던 동계훈련도 2번이나 뛰었다. 작은 훈련들은 수시로 있었다. 전방이 아닌 전후방이어서 훈련이 유독 많았던 부대였었다.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계급을 떠나서 친구처럼 지낸 녀석들도 있는데 몇 안되지만 종종 그네들과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야외진지공사를 하면 풀밭위에 마대자루 한장을 깔고 하늘을 이불삼아 구름을 보며 오침을 즐기기도 했고 다함께 대형비닐에 비벼먹던 짬밥도 기억난다. 함께 했기에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위계질서가 있었지만 누구나 막내일수만은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이 전설이 되어 제대를 하게 될 테니 말이다. 2년 2개월에서 현재는 18개월의 군생활을 한다고 하니 제대한지 10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다시 21개월로 늘린다고 하는데 줄이는 것이 쉽지 늘리는 것이 쉬운 일인지 모르겠다.

군생활은 전시상황에 누군가의 가슴에 총을 들이대어야 하는 가슴아픈 전제를 깔고 하는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위계질서라는 특이한 상황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20여년 남짓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군에가는 후배들에게 늘 이런 말을 했다. 군은 어쩌면 남자들에겐 마지막 휴식처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고... 힘들더라도 잘 견디고 몸 건강히 다녀와 너만의 전설을 꼭 이루고 제대하라고 말이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군생활에 대해 묻는다면 힘들다는 이야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수해복구


추석연휴가 시작되던 21일 화요일 중부지방에 100여년만에 최고 강수량을 보였다고 한다. 그때 나 역시 인천의 할머니댁을 전철로 가고 있었다. 이미 집에서 나와 얼마 안되어 홀딱 젖어버린 상태로 전철로 이동하고 있다가 종로3가에서 인천행 전철은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방송이 들렸다. 구로까지만 운행된다고 하니 구로에서 버스 등으로 이동할 생각을 했지만 정작 구로역에서는 인천행 버스가 거의 없고 88번 버스 하나가 있었는데 영등포와 몇군데 이외에는 서지 않아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는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그 와중에 자가용 운전하시던 분이 얼마전부터 다시 전차 운행이 되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다시 구로역으로 돌아와 무사히 할머니댁에 갈 수 있었다. 구로역에서만 1시간 여를 돌아다닌 듯 하다. 보통은 1시간 40여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그날 무려 4시간이 넘어서 도착했다. 아버지는 가게에서 나보다 약간 먼저 출발하셨는데 좀 더 고생을 하신 모양이었다.

여름철 장마, 태풍, 가을장마 등으로 수해가 났다는 뉴스를 들을 때면 언제나 군대에서의 수해복구 작업이 생각난다. 군에서 힘든 일병시절 어머니의 면회로 첫 외박을 하던 날 부대근처에서 숙박을 하며 하루 쉬는데 그날 금촌역이 물에 잠겼었다. 그래서 부대에서는 외박 및 휴가복귀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물난리로 복귀가 어려웠는데 난 그때 운좋게 무사히 복귀했었다.

내가 2000년 상병이었을 때만 해도 금촌역주변과 인근은 자주 둑이 무너져 물이 넘치는 바람에 수해를 매년 겪는 곳이었는데 당시 크게 수해가 났었다. 인근의 3개 사단에서 총출동해서 수해복구를 했을 정도였다. 나도 그때 3~4일간에 걸쳐 수해복구 작업을 나갔었다. 처음 보는 수해장면.. 뉴스에서만 보던 수해지역은 화면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피해를 입은 시민들은 물만 퍼내고 가제도구를 정리할 뿐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군장비가 아니었다면 복구하는데에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병들도 복구작업 도중 파상풍 등으로 다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전 장병이 파상풍 예방주사를 맞고 주민들에게 피해없도록 부대에서 음식을 실고와 밥을 먹고 다시 작업을 했었다. 쓸수 있는 것들을 빼내기, 물퍼내기, 쓰레기치우기 종일 힘쓰는 일만 했지만 매일 아무리 일을 해도 진도가 안나간다는 기분이 든 건 그만큼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3개 사단이 한번에 동원된 것도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했다.

한번은 이동중 시장골목을 지나갔는데 진흙과 쓰레기, 오물이 뒤섞인 물이 쓸고 간 시장은 이미 쓸 수 있는 것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대가 낮은 곳은 꽤나 높이 자란 나무의 절반이상이 물에 잠겼었는지 진흙 투성이가 되어 있었으니 인근의 주택은 완전히 잠겼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수해가 나면 뉴스에서나 소식을 듣고 잠깐 관심을 가지는 사건이었지만 직접 현장에서 보고 복구작업의 일원이 되어보니 느끼는 것이 많았다. 도심 속에 살면 군인들 무슨 일들을 하는지 잘 모르게 되는 것 같다. 요즘 군대는 물론 국방의 의무로 나라를 지키고 전쟁시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게 되지만 평상시 인근 주민을 돕고 피해가 생겼을 때 가장 신속히 도움의 손길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내 군생활도 떠 올려보면 총을 잡았던 시간보다 삽을 들고 작업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군생활도 하기 나름이지만 고생하는 장병들을 뉴스화면등을 통해 볼 때면 늘 내 군생활을 떠 올리며 수고한다는 위안의 말을 건내보곤 한다. 올해도 태풍 곤파스와 며칠전 국지성집중호우로 인해 피해를 입은 곳에 많은 군인들과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의 손길이 큰 도움을 주었을 거다. 힘내시라는 격려의 글만 적는 게 부끄럽다. 당신들이 있어 피해입은 분들이 큰 힘을 얻고 있음을 기억하세요.

아버지


울 아버지께서 신문에 나셨다.
몇년전 경향잡지에 나오셨는데 이번엔 평화신문에 나셨다.
50여년간 양복, 수선일을 계속해오신 명장이시다.
지금은 홍지동에서 작은 수선가게를 하시지만 아직도 오랜 단골들이 찾아올만큼 아버지 실력은 여전하시다.

아래 평화신문기사 링크다.

2010.9.12일자 평화신문
http://web.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349633&path=201009



지난 경향잡지 기사




곤충총목록 출간


한국곤충총목록이 16년만에 드디어 출간되었다.
이전에는 자연과 생태에서 한국응용곤충학회와 한국곤충학회에서 함께 펴냈는데 이번에는 '자연과생태'에서 펴냈다. 한국생물지사업에 곤충도 포함되어 있어 목록작업은 이 사업의 일환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다.



그동안 변화된 곤충목록의 최신버젼이 드디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형식을 보니 1994년 곤충명집과는 달리 각 종마다 참고한 문헌을 밝혀 이용하기 더욱 편리해졌다.

곤충 전체목록을 정리하는 것이 대단히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 과정의 지루함과 고됨을 잘 알고 있지만 아쉬운 점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목록작업을 해서 성과를 제대로 낸 사업은 '국가표준식물목록'이라고 생각한다. 책으로도 나왔지만 목록이라는 것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계속 변화하는 것이다. 명집은 출간과 동시에 정오표나 증보판이 나와도 무색할 정도로 계속 변화한다. 94년 곤충명집이 나올 때는 웹이란 공간이 그리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출판물의 형태가 가장 배포하기에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드시 출판물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생물의 이름에 대한 표준안을 제시하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학문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지금은 웹에서 동호회의 형식으로도 곤충은 즐기는 취미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목록보다는 쉽게 복사해서 사용할 수 있는 웹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빠르게 유포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출간도 중요하지만 인터넷이 잘 발달된 시대에 웹을 통해 공개하고 지속적인 수정을 계속해 나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방의 경우 일본에는 ListMJ http://listmj.mothprog.com/ 라는 사이트가 있다. Moths of Japan이라는 문헌(일본 나방도감)의 목록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관리하고 있는 사이트이다. 이 문헌은 증보판이 나왔지만 이전 판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계속 변화하는 학명의 최신버젼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여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홈페이지는 아니고 html페이지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본래의 기능은 충실히 하고 있다. 또한 단순히 목록만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헌을 통해 변경되었는지 출처까지 상세히 변경사항을 잘 정리하여 누구나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전에는 PostMJ라는 소책자를 통해 Moths of Japan의 변경사항을 배포해 온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온라인에서도 참조가 가능하다.

앞서 예를 든 국가표준식물목록의 경우도 사용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목록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종을 계속 등록하고 있다. 이는 매우 효율적인데 이와 같이 목록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면 정기적으로 목록을 출판하여 업그레이드 하기도 훨씬 수월할 것이고 목록이 책으로 출간되기 전이라도 최근 변동사항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나 국가표준식물목록 홈페이지에서 핵심은 작업물을 엑셀파일이나 html파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으로 출간된 것은 비매품이어서 구입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국립수목원 홈페이지나 국회도서관등에서 전문을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목록사업의 목적은 연구목적이외에도 혼동되고 있는 국명과 학명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표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식물분류가 전문가의 영역에서 일반 대중들도 참여할 수 있는 범주로 까지 확대된 시기에 시기적절하게 목록을 이용하기 쉬운 형태(엑셀, html)로 제공함으로서 파생된 효과가 목록사업의 성과를 확실히 달성하게 했다는 생각이다. 식물동호회 사이트들은 이 목록을 기준으로 표준화된 국명과 학명사용을 대중화시켰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목록이 유포되었다고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목록의 배포만으로도 자연스럽게 파생된 결과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곤충분야에서도 주목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식물목록이 5000여종인데 비해 곤충은 이의 수배에 해당되는 분류군의 크기를 가졌지만 내심 이런 식의 목록화가 진행되기를 내심 바랬다. 한국 생물지사업의 몇가지 결과물을 보니 사업의 일환으로 곤충분야의 목록화 작업도 진행될 거라고 추측해본다. 출판물의 형태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목적을 살려 온라인 작업도 진행되어 보다 쉽게 생물의 학명과 추천된 표준명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나비웹도감


내가 종종 들르는 인디카(http://www.indica.or.kr/)라는 사이트에 나비도감을 제작해봤다.
접속하려면 인디카 홈페이지에 방문해 상단에 [나비도감]버튼을 누르면 된다.
제로보드의 특성상 도감의 형태로 이용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통합검색이나 카테고리를 잘 활용하면 되지만 참여자가 모두 해당 분류군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제목이나 내용검색을 해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3가지 버젼으로 나누어서 제작을 해보았다.
일단 검색시간을 고려해 범위를 주로 나비사진이 올라오는 게시판 2곳으로 줄이고 기존 통합검색시 썸네일이 적게 표시되는 것보다는 10개정도의 썸네일이 한번에 보이는 것이 검색시 편리할 것이라 생각되어 반영하였다.







기존의 통합검색기능을 간단히 구현하면서도 검색범위가 줄어서 검색속도도 향상되고 원하는 나비관련 글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최근에 나온 한반도의 나비목록을 기반으로 인디카의 나비사진이 어느정도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처리했는데 아무래도 실시간으로 게시물을 목록대로 반복해서 조회하는 형태라 처리하는 속도가 느린 게 단점이었다.

모든 나비관련 게시물에서 사진에 항상 이름이 정확히 붙은 것은 아니라서 썸네일로도 어느정도 나비를 구분해 낼 수 있는 사진을 선별하여 도감식으로 나열한 버젼을 추가했다.

나비웹도감이라고는 하지만 나비별로 설명을 추가한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것이 많지만 프로그램을 구현하면서 기존 통합검색을 보완하는 정도로는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인디카의 관리자는 아니지만 허락을 받아 종종 작은 프로그램들을 추가하고 있다. 지금은 야외에서 사진촬영하는 기회가 적어지고 있어 다른 분들의 사진을 눈요기만 하고 있는데 그 분들의 야외활동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래본다.

2010년 연말경 인디카사이트가 외부공격을 받아 서버가 피해를 입어 상당수의 나비 및 동물 사진들이 사라졌다. 풍부했던 나비사진들이 사라진 것이 마음이 아프다. 지난 몇년간 나비관련 글들에 댓글로 이름을 알려드리고 즐감하곤 했는데 한번에 많은 자료들이 날아가버렸다. 프로그램은 정상작동하지만 사진이 없어 x표시가 많이 보이는 것이 볼 때마다 안타깝다.

2012년 홈페이지가 개편되고 제로보드4.x버젼에서 상위버젼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개발한 페이지가 사라졌다. 홈페이지개편과 함께 기존프로그램의 수정 요청이 있었지만 상위버젼은 단순히 업데이트된 것이 아니라 게시판 구조가 많이 변경된 형태라 수정작업에 응하지 않았다. 현재는 나비웹도감을 사이트에 들어가도 활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