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림 - 자연과 어울어지기, 그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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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공부하는 人입니다. 생물의 죽살이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해온 문화와 이야기도 함께 알아가고 싶습니다.

I am studying nature. I want to know not only the life history of living things, but also the culture and stories they and humans have shared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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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생활과 군복무기간


1999년 그때는 군복무기간이 26개월이었다. 2년 2개월의 애매한 군복무기간때문에 대학생인 경우 12월이나 1월에 가게 되면 학교로 바로 복학하는 경우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군생활까지 합쳐 3년을 쉬는 것이 다반사였다.

나보다 이전 군선배들도 들었던 이야기겠지만 군생활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했다. 내심 내 군생활 동안 며칠이라도 좋으니 군생활이 줄어라 하며 노래를 불렀지만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다가 병장즈음에 정작 군복무가 2년으로 확정되자 딱 내 군번까지 대상에서 제외되어 단 하루도 혜택을 받지 못한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등병 6개월, 일병 6개월, 상병 8개월, 병장 6개월이었는데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다. 종종 사촌동생이나 후배들에게 들어본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난다.

당시엔 지금에 비하면 월급이 아주 적었다. 아무리 많이 받아야 2만원 정도이고 평소에는 병장이 1만원 내외였으니 군것질 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런 돈도 거의 쓰지 않다가 계를 들어(남자들끼리도 그런 게 있었다.) 제대할 때 10여만원을 가지고 나왔고 분대장이 되었을 때는 모아두었다가 며칠동안 야외훈련이 있을 때 분대원들 간식을 사는데 탈탈 털어버리곤 했다. 제대를 앞두고는 분대원들 회식비로 모두 써버렸다. 2만원이 얼마나 되냐고 하겠지만 군대의 물가는 좀 달라서 분대원 6명 정도가 어느정도 배부르게 먹을 정도의 돈이었다. 휴가를 나가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오는게 싫어서 월급만으로 필요한 것들을 사고 생활했었다. 당시 내게 필요한 것은 별로 없었기에 가능했다.

지금부터 회고하는 내용은 엄연히 내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나와 같은시기에 군생활을 했다고 해도 부대마다의 특성이 워낙 달라 천차만별의 군생활을 했을 것이다. 이등병 시절, 처음 자대배치를 받고 보호대상이라는 표시로 노란색의 병아리 견장을 달았었다. 지금도 종종 TV에서 보면 아직도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병아리견장을 달고 있으면 함부로 놀리거나 장난을 치지 않고 처음 부대에 들어온 신병들이 부대돌아가는 상황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자대생활이 아직 미숙한 이등병들은 많이 어리버리해서 연병장 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더랬다. 자대에서의 긴장감은 동기들하고만 있던 훈련소와는 많이 달랐었다. 내겐 5명의 동기가 있었는데 종종 동기없이 홀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일병이 되어서는 아침부터 잠자기 직전까지 바쁘게 일하는터에 아침에 세수를 해 본 기억이 없다. 이등병때도 자대생활한 이후로는 아침에 세수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등병이 빠졌다는 시선때문이었다. 내가 말년이 되었을 땐 아예 소대장들이 나서서 이등병들이 씻으러 갈 수 있도록 나서기까지 했었다. 한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불려다니며 일하다가 씻지도 못하고 점호하고 바로 잔 기억이 있다. 일병은 6개월이지만 일만 하다가 보면 번개같이 지나가는 시간이다. 상병은 무려 8개월이었기 때문에 지루한 시기였다. 상병이 꺾이면 선임급이 되어 이등병과 일병들에게 일을 시키고 소대 내 재물검사를 담당하는 등 중요한 일들이 맡겨졌다. 작업도 많이 하지만 단순히 힘만 쓰는 것이 아니라 후임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시키는 것까지 담당하여 상병급이 잘하면 소대생활도 많이 편해진다. 운이 좋으면 상병이 꺾이고 분대장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내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운이 좋지만도 않았던 것이 이등병부터 분대장을 달기 전까지 바닥 막내 생활을 할 정도로 꼬인 군번이던 내가 바로 윗고참의 사관생도 지원으로 인해 갑자기 풀리게 되었다. 물론 좋긴 했지만 탄약수 생활만 하다가 부포수, 포수를 한달씩만 경험하고 분대장이 되려니 많은 공부를 해야만 했다.

군생활동안 가장 힘든 것은 물론 장시간의 행군이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주특기 훈련, 고된 작업 등 많지만 쉬는 동안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다. 유일한 낙이자 소일거리라고는 편지쓰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겁고 힘들지만 행군을 하러 부대 밖으로 나가는 일이 내겐 행복이었다. 군생활전에도 산이고 들을 오가며 공부하던 터라 숲으로 훈련을 나가는 때면 내겐 보는 것이 곧 책이요 배움이었고 즐거운 취미생활이었다. 분대장이 되고서야 처음으로 책을 봤다. 일병 때였던가 총기류를 닦다가 바닥에 깔아놓은 국방일보의 기사를 봤다는 이유로 엄청 혼나고 맞은 기억이 난다. 내가 군생활하던 곳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 고참들의 시선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개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상병 말호봉이나 병장때나 책을 볼 수 있었다. 분대장이 되고서는 시간이 날때마다 책을 보고 아침에도 조금 일찍 일어나서 책을 봤었다.

이등병때부터 상병이 되고서도 고참들은 무조건 순서대로 병기의 명칭과 부품, 제원들을 외우게 했는데 그게 싫어서 하사관에게 부탁하여 내 주특기의 교범을 빌려 공부하고 비가 오거나 주특기 실내 교육이 있을 때면 이전 고참들이 하던 방식을 버리고(제원이나 부품을 순서대로 하나도 틀림없이 모두 외워야했다.) 토론식으로 재미있게 진행했었다. 덕분에 후에 분교대 조교로 발탁되어 7주일정도의 파견을 3번정도 나가게 되었다. 종종 상병들을 모아놓고 포수교육을 시키면서 재미있는 문제를 내고 라면을 하나 부상으로 걸기도 했는데 언제나 인기만점이었다.

지금도 종종 독설적인 표현이나 말투가 섞여 나오는데 이건 모두 군생활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번 내뱉기 시작한 욕과 거친 말투는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후 오랫동안 느꼈다. 돌이켜보면 군생활이 참 재미있었다. 힘든 기억도 많고 나 역시 행군도중 물대논 물에 머리 박고 죽고 싶었던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힘든 것들을 모두 겪고나니 한계에 대한 기준이 크게 달라졌다. 크게 무너져버린 자존심을 계급이 올라가면서 다시 조금씩 쌓아올리고 나서는 다시 한번 나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느꼈다. 말년휴가때 복학준비를 다하고 제대하러 부대에 들어와 마지막 취침을 하던 날 새벽에 혼자 깨어 자고 있는 소대원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120여명과 함께 생활한 중대생활.. 120순위에서 시작해 1순위가 되어 나가는 내가 믿어지지 않았고 더 재밌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내게는 동기들이 5명 있었는데 그 중 3명이 뒷배경으로 자대생활에서 빠졌다. 한명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게로 군간부로 있던 친척의 도움으로 의가사제대를 했고 한명은 대대장 CP병을, 또 한명은 있지도 않던 주임원사 CP병 자리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빠져나갔다. 그리고 뒷배경없던 나와 거구의 동기 한명만이 서로 의지하며 꿋꿋하게 군생활을 해 나갔다. 그 친구와 함께 같은 날 제대하고 싶었는데 운없게도 녀석의 분대원중 한명이 자살소동을 벌여 아무 잘못없는 녀석이 연대책임으로 영창을 다녀오는터에 1주일이 제대가 늦어져 내가 먼저 부대를 나왔다. 처음 5명의 동기들이 이등병이었을 때 제대하는 날 연병장에 대고 2년간의 모든 설움과 고통을 다 함성으로 쏟아내고 나가자고 다짐했었는데 그걸 해낸건 나 혼자였나보다. 같이 제대한 동기는 모두 CP병으로 별로 동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낙오자들이었다. 그네들이 연병장에 쏟아낼 설움과 고통이 있었을까 싶다.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린 연병장에 대고 온갖 험한 말들을 쏟아내는 내게 위병소의 후임들은 처음보는 내 모습에 놀라는 듯 했지만 그네들도 꼭 나가는 날 그러리라 맘 먹은 녀석들도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내 2년 2개월의 군생활은 끝났다. 훈련이 반이요 나머지는 작업이라 인근 농사짓는 주민들의 자원봉사, 대민지원, 수해복구, 진지공사, 수로공사, 방화선 작업 등 여러 작업들을 해보았고 무슨 일이든 더 배우고 싶어 그중 오바로크병이 되어 재봉틀도 만져봤다. 생물학과 출신임에도 의무병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응급처치교육은 3번을 받았다. 분교대 주특기 조교로 3번을 나갔었다. 훈련복이 지지리도 많아 남들 한번 뛰거나 제낀다는 유격을 2번이나 뛰었고 연대전술훈련(RCT)도 2번을 그 추웠던 동계훈련도 2번이나 뛰었다. 작은 훈련들은 수시로 있었다. 전방이 아닌 전후방이어서 훈련이 유독 많았던 부대였었다.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계급을 떠나서 친구처럼 지낸 녀석들도 있는데 몇 안되지만 종종 그네들과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야외진지공사를 하면 풀밭위에 마대자루 한장을 깔고 하늘을 이불삼아 구름을 보며 오침을 즐기기도 했고 다함께 대형비닐에 비벼먹던 짬밥도 기억난다. 함께 했기에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위계질서가 있었지만 누구나 막내일수만은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이 전설이 되어 제대를 하게 될 테니 말이다. 2년 2개월에서 현재는 18개월의 군생활을 한다고 하니 제대한지 10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다. 다시 21개월로 늘린다고 하는데 줄이는 것이 쉽지 늘리는 것이 쉬운 일인지 모르겠다.

군생활은 전시상황에 누군가의 가슴에 총을 들이대어야 하는 가슴아픈 전제를 깔고 하는 것이지만 평상시에는 위계질서라는 특이한 상황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20여년 남짓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군에가는 후배들에게 늘 이런 말을 했다. 군은 어쩌면 남자들에겐 마지막 휴식처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고... 힘들더라도 잘 견디고 몸 건강히 다녀와 너만의 전설을 꼭 이루고 제대하라고 말이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군생활에 대해 묻는다면 힘들다는 이야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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