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림 - 자연과 어울어지기, 그 첫걸음

About Me

자연을 공부하는 人입니다. 생물의 죽살이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해온 문화와 이야기도 함께 알아가고 싶습니다.

I am studying nature. I want to know not only the life history of living things, but also the culture and stories they and humans have shared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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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생각 하나


2007년 '어울림' 홈페이지를 운영했을때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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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카는 올해로 8살이다.
가끔씩 데리고 나가면 내 나이도 있는지라 내가 일찍 결혼이라도 했는지 알고 오해를 많이 받게 되지만
태어나서부터 줄곧 보아온지라 미운 정 고운정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니지만 내가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닐때 종종 집에서 표본을 만들거나 표본을 정리하면 와서 구경도 하고 그랬다. 때때로 어린 녀석을 데리고 나가서 채집망과 채집모자를 씌워주고 잡아보게도 하곤 했었다. 하지만 녀석에게 잡아서 죽이고 표본만드는 방법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대신 관찰하고 그 다음은 놔주도록 한다. 하지만 녀석은 커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 같다. 실제로 야생에서 사람을 공격할 만한 커다란 육식포유류가 사라져가면서 실제로 산에 가면 사람보다 강한 생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는 커다란 자연계안의 한없이 약하고 작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보다 10년 위 10년 아래의 사람들과 주로 지내다보니 자주 잊고 있었던 것을 조카를 통해 느끼게 되는데 그건 내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주변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생물과 조카와 그리고 나 사이에는 몇 번의 사건이 있었다.
어릴 적 말을 잘 못알아듣는 녀석은 잠들었다가 깨어나 엄마나 할머니가 없으면 울어대곤 했다. 삼촌인 내가 있어도 녀석은 막무가내로 울곤 했다. 내가 봐주는 날이면 곤혹을 겪기도 했는데 한번은 우리집에서 잘 내려다보이는 비둘기집을 가리키며 녀석의 호기심을 그쪽으로 돌려본 적이 있다. (집 건너편에 비둘기가 이웃집 베란다 구석에 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는 곳이 있는데 우리집 계단에서 잘 보인다.) 비둘기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마는 조카를 달래기 위해 그것들을 보여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니 녀석이 알아들었는지 한동안은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었었던 것 같다. 흔히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에게도 적용되는 듯 싶다.

내가 조카에게 그간 가지고 있던 표본들을 보여준 것은 더 커서부터인데 경험상 아이들이 직접 만지고 싶어하는 것을 잘 알기에 주의부터 단단히 주고나서야 보여주었다. 나비며 하늘소, 사슴벌레 등등 여러가지를 보여주고 이름도 알려주었었다. 종종 집에서 곤충을 키울때면 녀석에게도 만져보게 하거나 먹이를 주게 했었다. 기억으로 녀석이 가장 무서워했던 녀석은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다. 생김새가 커다란 집게를 달고 있는 녀석들이라서 그런지 무서웠나보다. 사슴벌레라고 알려주니 얼마간 잘 부르다가 내 졸업식날 와서 실험실에 들어와서 사슴벌레 표본을 보더니 당당히 이러는 것이다.

"삼촌~ 집게벌레~~"

그래 자랑스럽다. ^^; 그렇게 알려줘도 네게는 집게가 더 맘에 들었나 보구나. 뭐 이름이 중요하겠냐. 네가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 더 중요한 거겠지.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녀석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강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 나비나 메뚜기, 무당벌레는 잡아도 놓아줄 줄 알면서도 집으로 들어온 개미는 가차없이 죽인다. 그 모습을 보고 왜 죽이느냐고 했더니 딱히 이유를 대지 못한다. 개미는 징그럽지도 않고 그리 협오감을 주지도 않는데다가 동화에도 자주 나와 어느정도는 친근감도 있을터인데 얼마 후 녀석이 말한 대답은 역시나다.

"우리집에 들어와 우리 식구들이 먹을 것을 먹으니까 이것들은 죽여도 되요"
이런 식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닭이나 돼지도 죽이고 많은 식물들도 죽이고 그러는데? 그럼 사람들은 더 나쁜 거네?"

조카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조카와의 대화에서 뒤돌아서 내가 느끼는 것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처음 채집을 다니면서 생명을 사랑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죽이는 공부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을 느꼈을 때와 비슷한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한번은 백담사 부근에서 형과 같이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앞서 산행하시는 분들 중 한 분은 백담사나 근처 산사의 스님이신 것 같았다. 바로 뒤를 따라 걷고 있던 터라 형과 나는 대화를 우연히 들을 수 있었다. 대화중 스님은 '스님들도 살충자입니다.'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하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겐 그 대화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가 늘 궁금했던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생명이란 비단 포유류나 양서파충류와 같이 크고 움직이는 동물뿐 아니라 작은 곤충이며 식물도 모두 해당되는데 스님들은 육식만을 피하고 식물은 먹는데 아무런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스님들이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내 질문이 잘못된 방향이었음을 지금은 어느정도 잘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식물에 대한 생명관이 왜 없을까.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 늘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이 식물인 것을 왜 오래전 사람들도 몰랐을까. 분명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육식만을 피하라고 한 것은 피를 가진 사람과 가장 비슷한 생물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선남선녀들이 식물을 꺽을 때의 마음과 동물을 죽일때의 마음이 같을까? 변화무쌍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식물에 대한 생명의식은 당장 눈앞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동물과는 달리 많이 약하다. 그들이 경계한 것은 생명에 대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얻는 마음을 중요시 여겼다는 생각이다. 육식을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이상으로 죽이고 쌓아두고 악한 마음으로 살생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한 것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래는 언젠가 지하철에서 본 글귀다.

- 선택의 갈림길에서

양개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습니다.
"지금 막 밖에서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해줘야 합니까. 그냥 내버려둬야합니까?"
"구해준다면 대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고,
구해주지 않는다면 한 생명을 져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자연의 질서도 깨뜨리지 않고,
생명도 져버리지 않는 길을 택해야지."
"?"

이 대화는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행위에 있지 않고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살기 위해 먹고 죽이는 것은 섭리이고 생태계의 이치다.

사람 또한 그러하다. 모든 불자들이 육식을 안하는 것은 아니며 여느 생명체와 같이 욕망대로 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많은 성직자들이 육식을 금하고 있다. 금하기 보다는 절제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수많은 나비를 죽이고 있을 때 마음 속에서 시작된 회의감이었다고 기억하는 그 느낌은 바로 위의 대화 속에 답이 있다. 내 마음 속에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으로는 큰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백담사의 한 스님의 이야기가 그래서 내게는 아주 재미있게 들렸다. 들을 때에는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재미있게만 들었다가 후에 생각해보니 무슨 의미였는지 알겠다. 조카의 행동과 말 그리고 나와의 대화 속에서도 느끼는 바가 있다. 지금은 왜 내가 어울림을 화두로 잡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공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무언가를 바로 얻기 위해 하는 공부도 분명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내 마음을 비추어가면서 배워가는 것들도 아주 많다는 것을 말이다. 기약없는 시간 속에서 하는 공부라는 것은 가끔은 언제나 해답을 얻을까도 싶지만 그 해답조차도 그때뿐이며 더 지나면서 또 다른 해답을 얻을 수 있음은 더욱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말썽도 늘고 내게 혼나는 때도 늘어가지만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길가다가 집주변에서 놀다가 모르는 곤충이나 벌레가 보이면 늘 나를 부르고 거기까지 데려간다. 더 크면 산에 데리고 다니며 이런 저런 것들을 관찰하고 함께 공부하고 싶다. 물론 조카가 그럴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분명 조카에게 내가 배울 것도 많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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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16 어울림지기 씀
2009.5 고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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